고려를 지킨 충절, 평산신씨 족보와 고문서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
춘천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에는 오랜 세월 평산신씨 후손들이 지켜온 수많은 고서와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최근 공개된 자료들을 보면, 단순한 족보를 넘어 고려와 조선의 역사, 종중의 운영, 후손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백성은 모두 나의 형제요 동포이며,
천하의 만물 또한 나와 한 몸이다.
대군(임금)은 나의 부모를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분이며, 벼슬한 사람들은 백성을 돕는 신하들이다.
나이가 많은 이는 내가 공경해야 할 어른이고,
외롭고 약한 이는 내가 보호해야 할 사람이다.
성인(聖人)은 천지의 덕을 한 몸으로 삼았고,
어진 사람은 만물을 한 몸처럼 여긴다.”
“족보는 단순한 이름 기록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단순히 이름을 적어놓은 책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제 고문서 속 평산신씨의 기록은 전혀 달랐다. 과거시험 답안지와 합격 교지, 임명장, 제례 절목, 편지, 묘역 관리 문서까지 남아 있었다. 당시 종중이 어떻게 조상을 모시고, 후손을 관리하며, 사회와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 자료인 셈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에 대한 기록이다. 신숭겸 장군은 후삼국 시대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최고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고, 이후 후손들에게까지 특별한 예우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전국에서 유일한 ‘한 사람 세 무덤’
춘천의 장절공 묘역은 전국에서도 매우 독특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한 사람의 봉분이 세 개로 조성된 ‘일인삼분묘’ 형태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숭겸 장군이 전투에서 목을 잃고 전사하자, 왕건이 금으로 두상을 만들어 안장하게 했다는 설이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다.
이 같은 이야기는 후대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실제로 묘역에서는 금두상 전설 때문에 도굴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후손들은 묘역을 지키기 위해 별도의 수호 절목을 만들고, 수호군과 관리 인력을 두어 묘역을 보호했다. 심지어 묘역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사람을 단속하고 처벌한 내용까지 문서로 남아 있다.
조선 시대 평산신씨 후손들의 삶도 고스란히
이번 자료에서 또 하나 주목받는 부분은 조선 시대 평산신씨 후손들의 관직 생활 기록이다. 정언공파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교지와 고신 문서만 100점이 넘는다.
문서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기록부터 지방 수령 임명장, 승진 교지, 관직 이동 내역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신응조, 신상현, 신일영 등 여러 인물들의 관직 생활이 연도별로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대부 가문이 어떤 방식으로 국가 운영에 참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신응조는 강원도관찰사와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외세에 대한 경계와 나라의 질서를 강조했던 인물로 소개된다.
종중은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
자료를 살펴보면 과거 종중은 단순한 친목 조직이 아니라, 조상 제향과 묘역 관리, 문중 재산 보호, 후손 교육까지 담당하던 공동체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장절공 묘소 관리 절목에는 제사 절차와 제수 배치, 묘역 관리 방식, 수호 인력 운영, 비용 조달 방법까지 매우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또 후손과 방문객이 묘역을 참배한 기록인 ‘묘알록’도 남아 있는데, 조선 후기부터 수많은 인물들이 장절공 묘역을 찾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족보와 기록을 지키는 것이 곧 종중의 역사”
전문가들은 평산신씨 고서와 고문서가 단순히 한 가문의 자료가 아니라, 우리 전통 사회의 운영 방식과 충절 문화, 종중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종중과 족보의 의미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이러한 기록은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오랜 세월 후손들이 지켜온 족보와 고문서. 그 안에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려 했던 충절과 가문을 이어온 사람들의 삶이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